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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음악 이야기

소설처럼 / 다니엘 페나크 / 문학과 지성사

by letter79 2020. 12. 5.

아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리듬은 다른 아이들과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도, 평생을 한결같이 언제나 일정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에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을 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포식 뒤의 식곤증처럼 오랜 휴지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거기에 아이 나름대로의 좀더 잘하고 있다는 갈망, 해도 안 될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감안한다면......

' 교육자 '를 자처하지만, 실은 우리는 아이에게 성마르게 빚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 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되돌려주어야만 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될수록 빨리! 그렇지 않으면, 누구보다 바로 우리 자신부터 의심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처럼 p. 61)

 

이야기꾼이었던 우리는 이제 몇 줄, 몇 장까지도 꼬장꼬장 챙기는 회계 감사원이 되어버렸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텔레비전 볼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마!"

그렇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텔레비전이 보상이라는 지위로 격상됨에 따라, 당연히 독서가 억지로 해야할 고역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 다름 아닌 바로 우리에게서 나온...... 우리 스스로의 발상이었따는 사실을 ........(소설처럼 p.65)

 

그 즐거움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 몇 해를 허송으로 흘려보내지 않으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이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이 머리맡에 앉아, 예전처럼 다시 아이와 읽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책을 골라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크게 소리내어

읽는 것.

그런 연후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상세한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도 하다.

중략.

반복은 아이를 안심시킨다. 반복은 친밀감을 보여주는 표지다. 다시금 그러한 친밀감을 느끼고 싶다는 열망 그 자체다. 아이는 그 낯익은 숨결에 다시 한번 젖어들고 싶었던 것이다. (소설처럼 p.71-72)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 (글을 쓰는 시간이나연애하는 시간처럼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훔쳐낸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그 ‘삶의 의무'의 닳고 닳은 상징물인 지하철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서관이 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이 그렇듯, 삶의 시간을확장시킨다.
만약 사랑도 하루 계획표대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에빠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들 사랑할 시간이 나겠는가? 그런데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도 책을 읽을 시간이 좀처럼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일때문에 좋아하는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독서란 효율적인 시간 운용이라는 사회적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 독서도 사랑이 그렇듯 그저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문제는 내가 책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소설처럼 p.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