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훌(문경민/문학동네/2022)
책, 영화, 음악 이야기

훌훌(문경민/문학동네/2022)

by letter79 2022. 8. 2.

만나뵌 적은 없지만 이 작가의 글을 좋은교사 잡지와 페북에서 읽고 있고 팬심이 가득했었다.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에서 무려 대상을 타셨다는데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책은 방학을 하자마자 출발한 여름 휴가 때 들고 갔다. 계곡으로 갔지만 내내 비가 왔었기 때문에 책을 읽을 시간이 충분했다. 이 책을 휴가 책으로 선택한건 최고였던 것 같다. 읽으면서 푹 빠져서 '아' 하고 탄식하고 '아 저런' 킥킥 이런 저런 소리를 내니까 옆에서 남편이 여러번 놀라기도 했다. 그만큼 푹 빠져서 읽었다. 몰입의 시간이 행복했었기 때문에 추천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대학만가면 집을 훌훌 털고 도망치고 싶었던 주인공이 '연우'를 만나고 나서 이상하게 가뿐해졌다는.. 희안하게 훌훌 더 가뿐해졌다는 그 이야기인데 제목 참 잘 지었다.

책의 내용은 스포가 되기 때문에 읽다가 수집한 문장을 죽 나열하고 책 정리를 마칠까 한다.

 

p.19 정체를 알 수없는 감정이 혼자 잠든 내 방에 불쑥 들어와 온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떠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괜한 소외감과 괜한 억울함, 괜한 서러움이 마음속 각기 다른 그릇에 담겨 찰랑거렸다. 찰랑거리던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넘쳐 주르륵 흘러내리는 날이면 나는 잠깐 돌아 버렸다. 칼로 필통을 긋고 지우개와 연필을 썰고 혼자 조용히 훌쩍이곤 했다.

(이 부분을 읽고 학교에서 만났던 자해 소녀들이 생각나버렸다. 하나같이 위기 가정이었던 아이들.. 정체를 알수 없는 그런 감정이 찰랑거리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그런 날에 그 아이들은 팔을 그렇게 그은 것은 아닐까 하면서 눈물이 죽 흘렀다.)

 

p.20 감추는 일은 반복할 때마다 익숙해졌다. 어느 지점에서 입술을 얇게 다물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화제를 바꿔야할지 자연스레 터득했다. 문제는 알수 없는 수치심이었다. 내 처치에 대한 원망과 분노, 배신감 같은 감정이 일렁일 때문 항상 수치심도 함께 움찔거렸다. 

(이 부분을 읽다가 최근 독서모임과 함께 매주 읽었던 IVP 커트톰슨 '수치심' 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수치심에 물들지 않은 영혼은 없고 그 수치심이 가진 파괴력에 대해 공부했던 것이 기억났다. 징한 놈....  고립되고 정죄감이 결국 머물게 하는 그놈이 이 소설에도 여지없이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수치심이다. 그 수치심이 결국 취약성이 온전히 알려지는 과정은 이상하게 영혼 깊은 곳이 움찔거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p. 47 할 일은 해야 했다. 설거지 같은 일이었다. 식탁에 밥 한 공기 더 올리면 되는, 딱 그 정도의 일이었다.

p.51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마음이 힘들어도 시간은 칙칙폭폭 앞으로 나아갔다. 아침, 점심, 저녁이 지나면 밤이 왔고 또다시 하루가 시작됐다. (중략) 내 처지에 맞는 미래를 계획하게 됐고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을 터득했다.

p.77 이토록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설마,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콧물이 돌았다. 서러웠고 치사했고 가슴이 뭉클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지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닥쳐 버린 모든 일이 그렇듯 이 마음도 어쩔 수 없었다.

p.91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반응할 수 있었을까. 대개 그런 잽싼 눈치는 평소에 눈치를 보며 사는 사람들이 획득하는 아이템 같은 거였다.

p. 96 연우는 눈물로 번들거렸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향해 세웠던 격벽에 금이 갔다면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이 문장은 중요한 문장이라고 느껴졌다. 이후로 연우는 다른 모습으로 주인공을 대한다.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라는 노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가사 중에 '한 줌의 용기와 한 방울의 눈물.. 그 눈으로 보게 되면' 그 가사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눈물로 번들거리는 주인공의 눈을 보면서 연우는 사랑을 보게 된 것 같다. 그래서 격벽에 금이 갔을 것이다. 누구나 떠오르는 그런 순간들이 있듯이)

p.154 세윤의 말이 맞았다. 학교를 통해서 성공하는 애들은 따로 있었다. 차분히 앉아 있는 걸 잘 할 수 있고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고 두뇌 회전이 빠른 애들이 학교 안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 했다. 불공평한 건 경제적인 요소만이 아니었다. 특정한 기질을 타고난 아이들을 우대하는 곳이 학교였고 학교에서 우리들이 치르는 경쟁은 따지고 보면 공정한 것도 뭣도 아니었다. (아 이 부분에서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다. 맞다. 공정한 경쟁은 아니다. 학교는 그런 곳이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찐으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p.161  주봉 대사 "그런데 뭐, 뭐가 문젠데? 부모님 감사합니다. 아멘 그런거 했을 거 아냐. 그럼 됐지 뭐. 입양이 대수야? 잘 살면 그만이지. 근데 쟤들은 뭔데?"

p.162 미희 대사 "실수하면 지는 거야. 이런일은 실수하면 지는 거라고. 지금 네가 하려는게 그거야. 실수" " 그래. 때려 내가 맞아 봐서 아는데, 너희는 그 뒤로 이어지는 사태를 감당 못해. 절대로."

p.207 선생님 대사 "하지만 유리야,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은 각각 다른 것 같더라. 감당해 낼 여건도 다르고. 설령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거야.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너무 힘들 때는 웃으려고 애써봐. 힘들 때 웃는 거, 효과가 상당해. 이거 경험담이야"

 

책을 다 읽고 나서 최근에 보았던 영화 '브로커'가 떠올랐다. 아이유가 연기한 미혼모, 그리고 베이비박스 그런 것들을 그렸던 영화 장면이 떠오르면서 잠시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애미와 아기가 떠올라서 그 감정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곤  책속에서 주인공이 취약성을 숨겨오면서 자라난 수치심이 묵직해져서 마음을 사정없이 쑤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 모습에는 나도 있었다. 이후에 훌훌 털고 온전히 알려짐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과정은 아름답다. 그 과정은 내가 어릴적 안면 기형으로 수술을 여러번 받을 때 여행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상처를 숨겨오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수치심은 그렇게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많은 영혼을 물들이는데 결국은 온전히 알려질때 가뿐해지는 것을 나도 경험했기에 주인공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소설 제목인 '훌훌'은 정말 최고의 제목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정말 한 줄도 빠짐없이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오랜만에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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