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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이야기/딴지묵상

성경통독 -레위기 편

by letter79 2024. 4. 5.

성경의 에베레스트라 불리는 레위기 등정을 마쳤다. 이번 등산은 꽤 담담하게 어렵지 않게 했다. 일단 몇 번 이 등산을 하다가 멈춘적이 더 많았던 경험과 너무 각잡고 성경 난제로 머리를 쓰다가 제풀에 지친적도 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한발 한발 같이하는 '완주'에 의미를 두자고 하면서 시작했다. 예전에 누군가가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꼈다길래 진짜 은혜로운 챕터인 줄 알고 읽었다가 '어 난 아닌데' 하면서 학습된 무기력과 좌절감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공동체에서 같이 읽으니 아무 생각없이 진도를 나갔다. 레위기 1장부터 시작되는 지루한  예배의 형식은 과연 제사 메뉴얼인가 복음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솔직히 전에 레위기 읽었을 때 마음이 어려웠던 부분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제사 설명할때 동물을 잡는 부분 부터 심리적으로 끔찍함이 있었다. 그리고 제사 형식을 하나하나 꼬장꼬장하게 주문하는 신이라니 매력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허술함을 다 품지 않으시고 너무나 단호하게 차갑게 말하신다니 과연 내가 믿는 하나님은 여기 레위기의 '나는 하나님이야~'  하는 그분이 맞는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이렇게 타협도 없고 소통되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은 매력적이지 않다. 아 물론 아브라함이랑 타협하시고 모세랑 타협하시긴 했군.. 그러나 나의 의심은 모세에게로 이어져서 모세는 과연 하나님이 말한 걸 대언한것이 맞는가? 고대 사람 모세의 가치관과 의식의 한계 안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닐까? 모세도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런 딴 생각을 하다보면 한장 한장 넘기기가 어렵다. 거룩이 주제라는데 그 거룩이 너무나 이상적이고 먼 이야기 같아서 나는 그런 거룩이라면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단어였다. 전에 내가 이렇게 의심하고 질문하면서 떠올린 레위기의 하나님 이미지는 꼬장꼬장한 꼰대 5-60대 남성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문득 그렇게 올라오는 반감이 내 안에 아담의 형질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반감은 과연 완전히 선한 것인가? 나는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이라면 피조물의 겸손함으로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은 그분이랑 씨름하면 될 일이니까 말이다.

 

신기하게 이번에 레위기를 읽으면서는 자비로운 엄마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정말 신기하다. 자비로운 엄마가 네살짜리 아기에게 혀짧은 목소리로 "우리아가 이거 이거는 지지에요. 이거 지지 만지면 콜록콜록 기침해요" 하는 것 같았다. 특히 정결법을 설명하는 부분은 내가 예전 수술실에서 근무할 때 contamination (오염)을 조심하는 걸 배우는 무균법 실습이 생각이 났고 코로나 시기를 의료진으로 지나오면서 겪었던 격리 개념과 완치 개념을 떠올리니 지혜로움으로 받아들여졌다. 지적하듯이 진단내리고 격리하는 개념이 아닌 이 민족공동체를 애처로이 바라보시는 감염내과 의사 역할을 하는 모세의 지혜로움이라고나 할까? 그 지혜로움은 하나님에게로 부터 온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 특히 가나안 땅의 몰렉신에게 예배하는 형식을 금새 따라할까봐 걱정하신 것 아닌가 싶다. 레위기 초반의 주제는 예배의 형식, 일상 윤리라고 정리해둔다.

 

후반부 16장부터는 대속죄의 날과 안식일에 대한 구체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역시 지루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18-19장에서는 차별금지법의 화두가 떠오르는 여러부분이 나온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는 가나안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성적으로 타락했는지 놀라면서 읽었다. 가나안 정복전쟁을 읽을때마다 눈살을 찌뿌리면서 전쟁광처럼 보이는 하나님이 멀리 느껴졌는데 오늘은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전에는 유대교의 한계인 선민의식으로 읽혔는데 오늘은 고유한 '너'가 대단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선택한 거라는 이해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갔다. 레위기를 오해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종교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레위기의 물음표가 점점 느낌표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직은 멀었다. 허나 "우리 아가 자세히 알려줄테니까 이렇게 한발 한발 걸어봐요" 하면서 혀짧은 목소리로 아이와 눈맞추고 꿇어앉아 이야기하는 자애로운 부모의 이미지. 그런 이미지로 읽게 된 것은 이전과 다른 내 안에 따뜻하면서도 분명한 변화가 있어서라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 이 레위기는 이 세대를 사는 나 읽으라고 쓴건 아니고 고대근동지방의 사람들을 독자로 예상하고 쓰인 책이니 나는 예전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한반도의 역사와 고대 사람들의 생활을 떠올렸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그 인생들을 바라보는 사랑의 시선일수도 있으니 내가 읽기에 불편해도 그 시선은 놓치 말자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오늘 레위기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뭔가 이전과 다르게 뭉클한 지점이 많았다. 통독 도우미 장로님이 설명하신 레위기의 신약적인 의미를 두고 넓게 보면 찐 사랑이 느껴지는 부분이 여기 저기 존재한다. 허나 모두 다 이해되지는 않는다. 거룩이라는 것이 관계와 시간 속에서 실질적으로 벌어지는 행동이라는것도 새롭게 생각하게 된 부분이다. 관계 속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특히 약자를)' 이고 시간 속에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념하는일' 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인간은 끊임없는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절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문득 수긍이 되었다.  그리고 안식일을 너무 율법적으로 지키면서 각종 형식과 틀에 얽매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정리가 되었다. 안식은 결국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안식 하셨으니 나도 내 깜냥을 알아 누리는 안식 자체가 축복이고 지혜라는 것도 정리가 되었다. 

 

마지막 날 희년 정신을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뜨거운 마음으로 소망이 되었다. 이 부분에 꽃혔다. 그래서 결론은 레위기는 복음이다. 내가 사는 세상은 전혀 희년정신과 상관없는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나라를 보면 자본주의가 얼마나 하나님 나라의 식과 법과 다른 부분이 많은지 생각해본다. 그렇다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은 아니었다. 잠시 성경과 같이 읽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 성경읽기] 라는 책을 인용하자면 대안은 예수님이었다. 약 1500년후에 나사렛의 예수님이 희년을 선포하신 부분을 잠시 인용해본다. 이 말씀이 선포되고 귀에 들린 사람들 사이에서 희년이 성취되고 있다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말씀이다. 더 나은 세상이 되기 위해 내가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욕망의 사람이 되지 않을텐데..그리고 예수님이 희년을 나를 통해 이루어 가셔야 할텐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