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쓰는 일
책, 영화, 음악 이야기

슬픔을 쓰는 일

by letter79 2021. 8. 1.

작가 : 정신실
출판사 : 아이브이피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애도일기로 쓰인글..
미친년글쓰기라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본인이 표현 할만큼 첫 글은 쓰인 글이었고 장례 후 6개월 후에 쓴 글 들은 쓴 글이라고 표현 했다.
나는 작가님과 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이 있었는데 그 한 네번째 만남 날이 이 책이 나오는 날이라고 얘기하시면서 이 책이 나온 느낌을 벌거벗은 느낌이라고 수치심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다.
작가의 전작들을 모조리 읽었으며 블로그에 들락거리며 그 끈을 잡고 있다 끝내 글쓰기 모임까지 하던 나는 그녀의 덕후다.
작가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지 상상도 못하겠지만 나는 정신실을 치유의 원형 이미지로 그리고 자주 떠올렸었다. 글로만 만났었고 개인 친분이 있진 않았기에 연락처도 몰랐지만 내가 속앓이를 하던 그 어느 새벽에 나는 그녀에게 마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몇 번이나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 달려간 상상으로 그려본 치유의 원형 이미지 였다. (실제로 그녀가 내 무의식으로 그리는 그녀와 다를수도 있다고 지레 겁먹고 정신을 차렸기에 달려가지 못했다)
갑자기 작가 이야기로 잠시 길을 잃었지만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본다. 이 책 서문격인 들어가며에 있는 네문단의 쓰인글, 쓴글, 쓰게한글, 날아든 글 부분을 두번 읽어보았다. 정말 달필이고 화장기없는 쌩얼의 글인데 이렇게 빛날일인가 싶다.

- 세상에서 가장 긴 장례식
23쪽 : 엄마에게 물려받은 유머 감각과 따스한 연민을 잃지 않고, 엄마가 남긴 모든 이들을 영예롭게 함으로 마를 영예롭게 했습니다.
31쪽 : 비정상적 상태의 글쓰기. 정상성에 대한 강박없는 글쓰기.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글쓰기. 그 새벽에 내가 바로 그 미친년글쓰기를 실행한 것이다. 그러니까 돌보면 미친년 상태였다.
39쪽 : ‘몸까지 나서서 아니라고 말할 때’는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엄마가 울면 가서 달래 줄 수 있고, 밥을 안먹으면 먹을 걸 챙겨줄 수도 있는데… 잠을 못 자는 건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 엄마 그게 너무 안타까워.”

44쪽. 천국 소망이 빛을 발해야 하는 이 시점. 아기 적에 터득한 사물의 영속성 개념이 아니라 영혼의 영속성을 알아들어야 할 지금, 나는 다시 퇴행이다.

49쪽 소설[애도하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그녀에게 감사를 표현한 적이 있습니까?

58쪽: 고름이 흐르듯, 이다. 찐득찐득한 고름이 자연스럽지도 아름답지도 않게 찌질찌질 흐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흐른다는 것.

71쪽 :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 그 둘의 차이를 ‘자기 비하’로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국가, 자유, 이상처럼 우리안에 자리 잡은 추상적인 것을 잃은 것에 대한 반응’가운데, 대상의 상실을 자기 비하의 감정 없이 극복하는 과정이 애도라면, 우울증은 극단적인 자기 비하로 상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중략)하지만 그리 쉽게 칼로 베듯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90쪽 : “나는 삶이 가장 두려울 때 죽음이 가장 두렵다.” 오늘 여기를 산다는 것은 부활을 믿는 믿음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죽음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현재가 선물이 된다는 것도. 멈추지 않아야할 성장의 정점은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은 오늘을 제대로 살게 하는 가장 큰 선물이다.

91쪽 :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다’ 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신념이나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신앙을 부정하는 것도, 믿지 않곘다는 의지의 발동도 아니었다. 감정의 표현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95쪽:
나는 믿는다.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들의 연결과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드는 오만불손한 내 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님, 우리 엄마, 먼저 떠난 이들의 몸, 그 몸들이 다시 사는 것과,
나의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139쪽 :
엄마가 떠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확인되는 것은 빈자리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다.

154쪽 : 그렇다. 슬픔은 때때로 공포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역시 루이스의 표현처럼 “무섭지는 않으나, 무서울때와 흡사한 느낌,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지는” 그런 상태다.

158쪽 : 애도에 대한 반응은 명백하게 신체적으로 온다고, 우는 것만 아니라 훌쩍거림, 가슴의 압박감, 딸국질, 헐떡거림, 한숨 쉬기, 목이 조이는 것 같은 호흡곤란,먹을 수 없음, 식욕부진, 목에 음식이 걸린 것 같은 느낌, 위와 신장의 잦은 탈, 육체적인 탈진 또는 흥분 등이다.

186쪽 : 결핍이지 은총인 나를 안고 한발 한 발 내디디다 결국 끝에 다다를 것이다. 그 끝에서 만날 것이다. 고아의식, 결핍과 상처, 수치심을 모두 씻은 듯 초월한 이들을. 망가진 몸에서 해방된 엄마가, 무너진 정신에서 자유로워진 예원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영혼으로 나를 기다릴 것이다.

213쪽 :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나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도다.

222쪽:
맹목적인 집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예배, 욕망의 투사일 뿐이라고 내가 비난했던 기도, 흠결 많았던 엄마의 신앙과 사랑을 더듬어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다시 닿았다. 온전히 떠나고 끝까지 미워할 수 있어 새로운 땅에 닿았다.

226쪽 : 거룩한 것 앞에서의 경외감, 신앙의 신비에 대해 입을 닫고 머리를 조아리느 두려움이다. 엄마의 인생, 엄마의 마지막 시간을 더듬으며 나는 이제 입을 닫으려고 한다.

232쪽 :  리처드로어[위쪽으로 떨어지다]
삶의 비극성에 대한 감각은 결코 비극적인 것이 아니다. 적어도 ‘큰그림’에서 보면 그렇다. 과거와 미래에 연결되어 있는 깊은 시간 안에서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필요한 고통을 준비케하고, 자신의 실패와 상실에 절망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고,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통과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공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보다 먼저 걸었고 우리보다 나중 걸어갈 거대한 인류 대장정에 합류하는 것이다.

234쪽 : 헨리나우웬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어 버리는 것이다.그들은 우리에게 거듭하여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지’말라고 한다. 죽음의 가장 큰 교훈은 바로’삶’인 것이다.

여기 진짜명문~~~!!!!!!!!!
나는 이제 이 신비 앞에서 상복이 필요 없는 죽음을 생각한다. 나의 죽음이다. 언젠가 마주할 나의 죽음을 가슴으로 안으려고 한다. 결국 다다를 비극 또는 신비인 나의 죽음을 부드럽게 사귀어 보겠다.(중략) 내 딸아,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상복을 벗고 ‘현재라는 선물’을 살아라. 반드시 죽을 너의 운명을 기억하되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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