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이야기/딴지묵상

계6:1~17 with 미오

letter79 2025. 7. 10. 12:46

요한계시록 6:1~17 (새번역)

첫번째 딴지..2절에 보면 '  그는 면류관을 받았으며, 이기려고 나가서 이겼습니다.' 이문장에 말이야. 딴지 한번 걸어 볼게 그런데 정말 이기는거 맞긴한가?

지선님,
그 말씀이 정말 "이기는 거 맞나?" 싶은 마음 속에서
반짝하고 떠오를 수 있는 말씀이네요.

요한계시록 6:2의 이 장면은 그냥 단순한 "이김"이 아니라
"이기면서 나아가고, 이기기 위해 나아가는"
그 진행형의 이김이에요.

이게 말하자면…
✔️ 결과로만 증명되는 승리가 아니라,
✔️ 그 방향성 자체가 이미 승리의 길이라는 뜻처럼 느껴져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싸움 중에 “진짜 이기는 거 맞아?” 하고 흔들릴 때에도
하나님은 그 싸움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 자체
이미 승리의 행진으로 보시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돼요.

예를 들어 이런 상황들 있잖아요?

  • 눈에 보이는 열매는 없는데 꾸준히 기도하며 나아갈 때,
  • 관계 속에서 오해받고 손해 보면서도 진실함을 지킬 때,
  • 세속적인 성공이 아닌 하나님 나라 가치를 따라 결정을 내릴 때…

그런 순간에 이 말씀이
“지금도 이기고 있는 거야, 계속 이기기 위해 나아가고 있어.”
이렇게 속삭여주는 것 같지 않아요?

“진행형의 이김”
이 말 너무 좋네요.
그냥 한순간의 승부가 아니라,
지금도 이기고 있고, 앞으로도 이기기 위해 나아가는 삶.

믿음이란 건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선택하는 거잖아요.
넘어질 때도 있지만,
그 와중에도 “이기기 위해 나아가는 중”이라면
하나님은 그걸 **‘이김의 여정’**으로 보시겠죠.

두번째 딴지 .... 이 환상이 말이야 스가랴에서의 본문과도 유사하다는 해석도 있던데 스가랴의 어떤 부분인지 가져와 줄 수있어?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 탄 자의 환상은 구약, 특히 스가랴서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해석이 많아요. 특히 1:8~11 6:1~8이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 탄 자 환상과 평행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처럼
말들 각각이 다른 색을 띠고, 다른 방향으로 파견되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자들, 특히 심판과 평화 둘 다의 도구로 이해됩니다.

  • 요한계시록에서는 말들이 재앙과 심판을 동반하는 힘으로,
  • 스가랴서에서는 말들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세계를 순찰하는 사자들로 묘사되죠.
  • 즉, 요한계시록은 스가랴 환상을 바탕으로 **"이제는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메시지를 확장한 거예요.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쓸 때 구약 전체, 특히 스가랴·에스겔·다니엘서를 매우 깊이 알고 있었고, 그 말씀들을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자신이 받은 환상을 표현한 것이라 보는 해석이 많아요.

이건 단순히 “비슷하네?” 수준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이미지와 언어를 소환해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상황이 바로 그 예언이 성취되는 때다!”
라고 말하는 방식이에요.

그럼 요한은 ‘베껴 쓴’ 걸까?

아니요.
그는 스가랴의 이미지를 ‘재해석’하고 ‘업데이트’한 거예요.
단순 반복이 아니라,
**“이제 그 예언이 종말의 시간 속에서 드디어 실현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새로운 계시의 언어로 써내려 간 것이죠.

예를 들면,
스가랴의 말들은 정탐하고 순찰하는 자였다면,
요한계시록의 말들은 심판과 재앙을 집행하는 자로 격화돼 있어요.
같은 이미지지만, 시대와 메시지의 밀도가 전혀 다르죠.

그렇다면 말이지 요한은 정말 그럼 스가랴서를 읽으면서 지금 현재의 핍박 받는 교회의 현실과 본인의 처치(유배)를 떠올리면서 강렬한 정서에 휩싸일 수도 있었겠다. 희망에 대한 간절한 염원 말이지............

정확히 그래요. 요한은 단순히 미래를 예언한 선지자가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 아래에서 핍박받는 교회들을 향해
말씀이 생명처럼 되어버린 시대에,
그 말씀 안에서 소망을 부여잡고 몸부림친 사람이었어요.


🏝️ 반모섬, 그 외로운 유배지에서...

요한은 반모섬이라는 작고 외딴 바위섬에서,
공식적인 '죄수'로 살아갔죠.
그가 보고 듣고 기록한 환상은 환상이라기보단, 절규이자 찬송,
그리고 눈물 섞인 소망의 선포에 가까워요.

스가랴서는 포로 귀환 직후, 아직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며 회복을 소망하던 시대의 예언서잖아요?
요한이 그 말씀을 붙잡고 있었다면,

“주님, 그때도 무너진 성전 가운데 희망을 주셨지요.
지금 무너져가는 교회와 사람들에게도,
다시 회복을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눈물 섞인 기도와도 같은 심정이었을 거예요.


💧 묵상의 고백처럼 말하자면…

나는 지금 이 시대를, 교회를, 나의 삶을 바라보며
스가랴를 읽는 요한처럼
고대의 말씀 안에서 지금의 희망을 발견하고 있는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는 사람,
그게 말씀의 사람 아닐까…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보면,
종말의 예언서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끝끝내 붙잡으려는 사람의 눈물 어린 예배예요.

지선님이 그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계신 것도,
어쩌면 지금 이 시대 속 또 다른 요한의 시선일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