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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좋은교사

학교 엄마

by letter79 2016. 11. 21.

어떤 집단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가족에서의 나.  친구관계 속에서의 나. 홀로 있을 때의 나. 의 모습이 아닌 직장생활 속에서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

 

참 좋은 질문이다. 그 질문에 잘 대답하면 자다 일어나서 툭 쳐도 대답이 딱 나올 정도로 제대로 된 대답을 가지고 있다면 성공한 직업인 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가진 직업은 '보건교사'이다. 병원 3.8개월, 노량진생활 1년, 기간제교사 3.5개월을 통과 지금 현재 있는 학교 라는 곳에서 8년차 '보건교사'를 하고 있다.

 

'보건교사' 라는 직업은 특수한 직업이다. 의료인도 아닌 교육자도 아닌 뭔가 그 애매한 가운데 어드매에 존재한다. 뭐 이 자리에 오기까지 노량진생활, 보따리장수 기간제생활 하면서 간절히 원해서 온 자리이지만 막상 해보니까 내가 꿈꾸던 그런 일이 아니었다. 이상과 현실은 늘 간극이 있었지만 아마 밖에서 보는 직업과 실제로 하고 있는 사람 사이의 간극이 꽤나 나는 일로 우리 업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이상은 이랬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그 시기 내 삶의 기쁨 중 큰 부분을 차지 하던 교회의 고등부 교사 생활이 나를 학교로 이끌었었다. 교회에서 만난 아이들의 반짝이는 검은 눈망울의 에너지가 나를 반하게 했었고 10대들 평생 곁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졌었다. 그들의 아픈 몸과 마음에 빨간약 발라주리라 함께 울어주리라 하는게 나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랬다. 생각보다 학교라는 구조는 아이들을 환대하는 것 보다 관리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그래야 유능하다고 인정받았다. 그리고 꽤나 순진하고 범생으로 살았던 나와는 다른 거친 아이들에게 여러번 생채기가 나면서 나는 점점 변해갔다. 이상의 나와 현실의 구조가 원하는 나는 많이 달랐는데 점점 나는 처음의 나의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변해갔었다.

 

그리고 학생을 다루는 시간 보다 문서를 다루고 사업을 진행하는 일이 더욱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요구했다. 매달 우유 급식 돈 계산을 하고 중식 지원 서류를 검토하고 받아내는 일과 급식 업체 계약관련 일과 같은 중식 업무가 가장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동사무소 공무원인가.. 아이들의 소리와 표정을 확인하는 것보다 서류랑 씨름하다가 숫자 하나 틀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일로 느껴지는 것이 좀 슬퍼졌다. 사람을 살피는 일보다 각종 사업을 진행하고 행정업무를 해내는 시간이 많은 줄 몰랐다.

 

그렇게 몇년이 지나가면서 최근에 다시 질문하기 시작한다. 학교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교사 인가, 행정가 인가, 사업진행자인가, 의료인인가.

 

학교라는 큰 구조를 돌아가게 하는데 걸리적 거리지 않게 아이들 뒤치닥거리하는 그런 나의 모습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아보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런 기억은 거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사 단체에 들어가서 학교를 바꾸는 사람이 되는 교육운동의 흐름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그 안에서도 기독 보건교사는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아무도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기독+교사 의 정체성에 의료인으로서의 '보건' 영역은 어드메 어떻게 있어야 하는건가..

 

병원 간호사는 구조적으로 의사의 오더(order)에 따르는데 비해 학교에서 주체적으로 보건사업을 진행하고 아이들을 간호사정(asessment)하고 판단해서 적당한 처치를 하고 보건교육까지 해내는 사람이 보건교사라는데..

역동적이고 주체적인 보건교사 보다는 학교의 큰 구조를 움직이게 하는 아주 작은 나사같았고 친절한 서비스를 요구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요구에 감정 노동자로 지쳐가는 내가 보였다.

 

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기 시작해봤다.

몇년 동안 찾지 못하다가 최근에 비슷한 답으로 찾아낸 단어는 '학교엄마' 라는 단어였다.

 교육이나 의료의 큰 흐름 어드메에서 나의 존재를 찾지 말고 그냥 학생 한명에게 내가 '학교엄마' 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것이다.

 

 만약에 이 학생의 엄마가 학교에 있었다면 할 일을 내가 하는 것이다. 성적에 영향을 주지도 대단한 의료적인 처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라면 할일을 그냥 나는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 하나가 나를 찾아올 떄 나는 그 시간 제일 필요하고 제일 중요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이 꽤 맘에 들었다. 나는 진료 혹은 상담의 태도를 조금 바꾸어보았다.  실은 공문 폭탄에 30~80여명이 들락 거리는 이 곳에서 엄청난 환대의 태도로 학생을 대했을 때의 소진 및 탈진은 당연한 일이다. 중학생을 다루는 일은 마냥 환상적인 일은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중2병에 파충류의 뇌(?)를 가지고 아직 전두엽에 완성되지 못한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일단 학생이 찾아오면 보건실 의자를 틀어서 학생을 향해 제대로 앉아 보았다. 의자를 틀어서 학생을 향해서 앉는데 2,3초가 소요된다(이때 잠시 숨을 고른다) 그 시간에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제대로 사람을 바라보자는 나의 의지를 다져보자는 작지만 의미 있는 큰 변화였다.

 그 변화가 나의 말투와 표정을 조금씩 다정하게 만들었고 여유롭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더 행복해졌다. 어느날은 내가 봐도 반할 만한 매력적인 일을 하고 있다. 엄마라는 존재는 친절을 강요받지 않는다. 그냥 본능적으로 내새끼니까 내가 책임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월급까지 준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있나..

 

내 직업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고 보니 이 직업은'심리적보상'이 많은 편이다. 다른 직업은 돈을 모으는 재미가 있지만 '관계의 맛'을 직접 보는 특별한 재미가 있다. (이 표현은 김수지 교수님의 '사랑의 돌봄은 기적을 만든다'라는 책에 나온다.)

 업무분장 애매해서 이것 저것 정돈해야할 때나 학교에서 애매한 위치가 서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점은 심리적 보상과 관계의 맛에 있지 않은가...

웃을힘이 없을 때에도 힘을 내어 웃으면서 아이들 바라봐주면 고마워하는 심리적 보상도 있고, 수업하면서 상호작용하면서 성적 매기지 않기 때문에 더욱 돈독해지는 관계의 맛 그런걸 이제 다시 느껴보고 있다.